Special · 생각하기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

비교에 휩싸이거나 삶의 기준이 타인에게 있는 경우,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려 하기보다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까지 ‘꾹 참고 자신을 억누르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나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타인이 그 가치를 매겨줘야만 비로소 인정받고 안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게 될 것이다.

글. 김상현(<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저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자. 자연 속에서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였던 우리는 힘을 합쳤고 무리를 만들었다. 무리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죽음을 선고받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고, 상대방과의 소통을 중요시했다. 상대방과 다툰다거나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리에서 나오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일 테니. 갈등을 피하기 위해 참아내거나, 다툼을 원만히 해결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사회적 동물이 되어갔다. 아마 이 글을 보고 계신 당신의 조상들은 원만히 갈등을 해결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 방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무리에서 제외됐을 테니 말이다. 수백만 년 전부터 이어온 인간 고유의 습성은 우리를 타인의 시선과 눈초리 앞에서 당연히 자연스러울 수 없게끔 만들었고, 누군가의 인정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고 발전하게끔 만들었다.

비교와 기준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이제는 누구와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도 쉽게 엿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쉽게 엿볼수록 비교와 부러움 역시 쉽게 생기게 되었을 테다. 그건 자연스럽게 ‘모자란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니 비교와 부러움이 많아질수록 스스로의 환경을, 아니 자신을 낮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 마음들은 점점 커지고, 머리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된다. 머리가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니 당연히 말도 행동도 곱게 나올 리가 없다. 나오는 말과 취하는 행동들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 뻗어져 나간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해 뻗어져 나간 말과 행동은 자신을 지키려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것 같거나, 위험하게 휘두른 칼과 비슷할 것이다. 자신을 지키려 했던 행동들 역시 결국 타인을 해치는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은 관계를 망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모든 초점이 상대방에게 맞춰져 있는 경우다. 나의 행복과 기분보다 다른 사람에게 모든 기준과 초점이 맞춰진다. 그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인냥 행동하고, 타인의 기분과 감정에 전전긍긍한다. ‘나’는 없다. 내가 없으니, 관계에 매달리게 된다. 관계가 시들해지면 모든 건 다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관계는 곧 내가 되고, 내 인생에 있어서 타인의 영향력은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그들의 한 마디가 내 하루를, 어쩌면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비교는 줄이고 초점은 나에게로 맞춘다.
스스로의 건강함을 챙기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개선될 것이다.
내가 없다면 그들도 없고 이 세상도 없다.

든든한 내 편
여전히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일주일만 방에 혼자 갇혀 있으면 새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는 건 그 방증이 될 것이다.
앞서 너무 극단적인 두 가지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요점은 하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은 결국 ‘나’다. 건강한 관계의 시작은 건강한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좋은 시간을 함께하며, 좋은 경험을 함께 쌓아가고, 좋은 감정을 교류하는 것, 관계는 결국 ‘주고받음’으로써 이뤄지고 유지된다. 내 안에서부터 나온 것들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상대방을 채우고, 다시 상대방의 것들로 내 안을 채우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안이 썩어 문드러져 있다면 상대방에게 줄 것들 역시도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썩 좋지만은 않은 그런 상태.
비교는 줄이고 초점은 나에게로 맞춘다. 스스로의 건강함을 챙기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개선될 것이다. 내가 없다면 그들도 없고 이 세상도 없다.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건강한 연습들을 통해 나를 채우길 바란다. 관계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인간관계에 지쳐갈수록, 타인을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수록 나는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는 일부터 돌이켜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건강한 마음가짐에선 모든 것들이 건강한 상태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찌 됐건 내가 가장 잘되길 바라는 건 결국 나일 테니 말이다.

Special · 생각하기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

비교에 휩싸이거나 삶의 기준이 타인에게 있는 경우,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려 하기보다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까지 ‘꾹 참고 자신을 억누르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나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타인이 그 가치를 매겨줘야만 비로소 인정받고 안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게 될 것이다.

글. 김상현(<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저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자. 자연 속에서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였던 우리는 힘을 합쳤고 무리를 만들었다. 무리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죽음을 선고받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고, 상대방과의 소통을 중요시했다. 상대방과 다툰다거나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리에서 나오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일 테니. 갈등을 피하기 위해 참아내거나, 다툼을 원만히 해결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사회적 동물이 되어갔다. 아마 이 글을 보고 계신 당신의 조상들은 원만히 갈등을 해결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 방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무리에서 제외됐을 테니 말이다. 수백만 년 전부터 이어온 인간 고유의 습성은 우리를 타인의 시선과 눈초리 앞에서 당연히 자연스러울 수 없게끔 만들었고, 누군가의 인정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고 발전하게끔 만들었다.

비교와 기준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이제는 누구와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도 쉽게 엿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쉽게 엿볼수록 비교와 부러움 역시 쉽게 생기게 되었을 테다. 그건 자연스럽게 ‘모자란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니 비교와 부러움이 많아질수록 스스로의 환경을, 아니 자신을 낮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 마음들은 점점 커지고, 머리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된다. 머리가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니 당연히 말도 행동도 곱게 나올 리가 없다. 나오는 말과 취하는 행동들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 뻗어져 나간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비롯해 뻗어져 나간 말과 행동은 자신을 지키려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것 같거나, 위험하게 휘두른 칼과 비슷할 것이다. 자신을 지키려 했던 행동들 역시 결국 타인을 해치는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은 관계를 망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모든 초점이 상대방에게 맞춰져 있는 경우다. 나의 행복과 기분보다 다른 사람에게 모든 기준과 초점이 맞춰진다. 그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인냥 행동하고, 타인의 기분과 감정에 전전긍긍한다. ‘나’는 없다. 내가 없으니, 관계에 매달리게 된다. 관계가 시들해지면 모든 건 다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관계는 곧 내가 되고, 내 인생에 있어서 타인의 영향력은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그들의 한 마디가 내 하루를, 어쩌면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비교는 줄이고 초점은 나에게로 맞춘다.
스스로의 건강함을 챙기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개선될 것이다.
내가 없다면 그들도 없고 이 세상도 없다.

든든한 내 편
여전히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일주일만 방에 혼자 갇혀 있으면 새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는 건 그 방증이 될 것이다.
앞서 너무 극단적인 두 가지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요점은 하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은 결국 ‘나’다. 건강한 관계의 시작은 건강한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좋은 시간을 함께하며, 좋은 경험을 함께 쌓아가고, 좋은 감정을 교류하는 것, 관계는 결국 ‘주고받음’으로써 이뤄지고 유지된다. 내 안에서부터 나온 것들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상대방을 채우고, 다시 상대방의 것들로 내 안을 채우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안이 썩어 문드러져 있다면 상대방에게 줄 것들 역시도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썩 좋지만은 않은 그런 상태.
비교는 줄이고 초점은 나에게로 맞춘다. 스스로의 건강함을 챙기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개선될 것이다. 내가 없다면 그들도 없고 이 세상도 없다.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건강한 연습들을 통해 나를 채우길 바란다. 관계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인간관계에 지쳐갈수록, 타인을 내 편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수록 나는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는 일부터 돌이켜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건강한 마음가짐에선 모든 것들이 건강한 상태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찌 됐건 내가 가장 잘되길 바라는 건 결국 나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