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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날던 유년의
하늘 위로 종이비행기 접어 날리다

서양화가 신제남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한다는 건 그가 살아낸 역사와 문화적 환경을 총체적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분단과 전쟁의 상흔 속에서 유년을 보낸 작가는 최신 전투기와 젊은 여인의 누드를 하나의 장면에 담고, 개화기 역사의 불안과 갈등을 화폭에 배치함으로써 우리가 도달해 있는 현실의 지점을 바라보게 만든다. 서양화가 신제남의 작업실에서 만난 역사적 감동과 예술적 공감의 순간을 전해본다.

글. 김수연 사진. 안지섭

연중 전시회가 상당히 많은 작가로 유명하십니다. 최근엔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십니까?
보통 1년에 20여 회 이상의 전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전 말고도 이런저런 초대전까지 합치면 거의 매월 전시 중이에요. 그림 그리는 작가이니 작업실에 이렇게 나와 그림 그리는 게 당연한 일상입니다. 그렇게 그려낸 작품이 이제 약 1,500점 정도 쌓인 것 같네요. 여기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좋아요. 24시간이 다 행복합니다. 어딜 놀러 갔다가도 늘 불안해서 어떻게든 작업실로 돌아올 궁리만 한다니까요. 아직도 그리고 싶고, 그려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형제분 중 새마을금고 이사장님이 계시다면서요? 평소 새마을금고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새마을금고는 아주 어릴 적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친숙하고 정감이 있어요. 철원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있는 신제영이 제 아우인데, 새마을금고와는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 새마을금고 상무로 있던 초등학교 때 친구가 연이 되어 동생이 새마을금고에서 일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사장까지 됐으니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솔직히 새마을금고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는데, 튼실하고 알토란같은 금융기관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동생이 자랑을 많이 합니다.

평생 화가로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오고 계신데요, 처음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작가로서는 비교적 순탄한 인생을 살았어요. 어릴 적 아버지가 은퇴하시고 가게를 하셨는데, 전 구석 자리에서 그림을 그렸죠. 신문에 나오는 영화 포스터도 그리고, 배우들도 그리고, 굉음을 내며 하늘에 날아오르던 비행기도 그리고요. 그런데 꽤 재주가 있던 모양이에요. 아주 자연스럽게 ‘쟤는 미대를 갈 놈이다’ 하는 게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어요. 거의 운명적으로요. 그러다가 형과 누님이 계신 서울에서 화실을 다니다 대학에 들어갔어요. 어쩌다 고향집에 가면 어머님은 잡지나 달력에 나오는 영화배우 사진을 오려뒀다 주셨어요. 어머님 나름대로 자료 수집을 해주시면서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지원해 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평소 확고한 역사의식과 철학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을 추구해 오셨는데, 그 배경과 이유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돈이 되는 그림’보다는 ‘역사에 남을 그림’을 그리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미술관에 걸릴 만큼의 시대적 가치를 담은 예술을 추구했어요. 아무래도 성장기에 보고 듣고 경험한 우리 현대사의 굴곡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죠. 철원이라는 곳이 전쟁과 분단을 상징하는 곳이잖아요. 어릴 땐 바로 머리 위로 최신예 전투기들이 휙휙 지나다녔어요. 어린 맘에 정말 가슴이 뛰더군요. 가공할 살상력을 가진 전쟁 무기지만, 다른 시각에선 또 얼마나 멋진 형상인지요. 작가가 된 후 그 이율배반의 감정을 화폭에 풀기 시작했습니다. 작가로서의 개인적 영예에 앞서 내 작품을 통해 동시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면 큰 보람이겠다 싶더군요.

작가는 작품을 통해 말한다고 하지요.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궁극의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학생 시절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극사실적 표현, 전혀 상관없는 대상들이 한 화면에 배치되었을 때 생성되는 시각적 긴장과 강렬한 메시지 효과에 매력을 느낀 겁니다. 그게 나의 성향과도 맞았어요. 세상엔 다양한 그림들이 존재해야 할 테고, 그렇다면 나는 좀 ‘다르게 가보자’ 생각했죠. 물론 어려운 길이었어요. 하지만 안이하게 그림을 그리긴 싫었습니다. 대신 나만의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어요. 무릇 예술가란 그런 운명 아닌가요? 그동안 10년 단위로 각기 다른 테마를 다뤄왔습니다. 첫 번째는 ‘금속성의 시대’를 통해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조명하고, 두 번째는 ‘역사의 재인식’을 주제로 독립투사들의 투쟁과 삶을 그렸어요. 그 다음은 인체의 미학을 다룬 작품을 그리고, 세상 곳곳을 떠돌며 풍경을 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문명의 공존’을 주제로 다루고 있지요.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이기보다는, 뭔가 성찰적 시선으로 보고자 하는 겁니다.

작품의 모티브는 주로 어디서 구하시나요?
제가 태어난 건 수원인데 철원에서 내내 자라고 성장했어요. 이북이 고향인 부모님이 곧 통일이 될 줄 알고 최대한 고향 가까이 살다 정착을 하신 게 거기죠. 철원이라는 도시는 우리 현대사의 치열한 기억이 가장 선명한 곳입니다. 어릴 적 북한 삐라로 딱지를 접어 놀았고, 곳곳에서 터지는 폭탄으로 다치고 죽어나는 사람도 숱하게 봤어요. 이런 기억이 다 내 그림의 소재가 될 수밖에요. 뭘 그릴지 찾느라 고민할 게 뭐 있겠어요. 자기 삶의 모든 풍경과 사건들, 자면서 꾸던 꿈의 이미지들까지가 다 소재가 되는 거죠. TV에 나오는 대중스타도,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도, 남북정상회담도 다 모티브가 되는 겁니다.

독립기념관, 백범기념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선생님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의미 있게 기억되는 작업을 꼽아본다면, 어떤 걸까요?
모든 작품이 다 의미가 있지만, 독립기념관에 작품이 들어가 있다는 건 상당한 영광이에요. 거기에는 윤봉길, 유관순,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한 작품이 들어가 있어요. ‘거룩한 분노’를 주제로 한 연작이에요. ‘일송정 푸른 솔은’이라는 작품도 함께 들어가 있는데, 당시 안중근 의사와 함께 거사를 했지만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김형재, 김성옥 등의 독립투사들이 담긴 작품이에요. 이분들의 가치와 희생을 일송정 푸른 솔의 이름으로 기려 보고자 했습니다.

화가로서 최종적 목표로 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덧 제 나이 70이 됐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재주로 그린 그림들을 아무 조건 없이 고향에 기증하여 미술관을 만드는 게 평생의 꿈입니다. 참혹한 전쟁의 기억이 있는 내 고향 철원을 새로운 문화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고향에서 활동하는 후배 작가들에게도 활로를 열어주는 길이 될 것이고, 철원이라는 도시가 더 이상 땅굴, 북한 노동당사 같은 걸로만 기억되는 게 아니라 문화적 자부심을 가진 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 싶습니다. 스페인 북부의 소도시 빌바오가 그랬듯이 말이죠. 빌바오는 쇠락을 거듭하던 곳이었지만 구겐하임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상당히 경쟁력 있는 도시로 탈바꿈했거든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해 주시는 팬들께 한말씀 남겨 주십시오.
지금 하고 있는 테마 ‘문명이 공존’이 1~2년 안에 마무리될 것 같아요. 그 다음 10년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니 그 모든 것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주제의 작품들이 될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또 비행기도 들어오고, 역사도 들어오고, 아름다운 인체도 들어오겠죠. 종교적 스토리도 다뤄볼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작품을 보시면서, 삶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하여 공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저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삶의 모든 풍경과 사건들,
자면서 꾸던 꿈의 이미지들까지가
다 소재가 되는 거죠.
TV에 나오는 대중스타도,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도,
남북정상회담도 다
모티브가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