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 생각하기

우리의 지금이
‘과정’이기에 품을 수 있는 희망

어떤 문제를 맞닥뜨릴 때 우리는 두렵다. 삶의 계단을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이 결과일까 봐, 지금의 결과가 삶의 결과일까 봐 겁이 난다. 심지어 지금이 결과라고 말하며 무너지기도 한다. 무너져도 된다. 넘어져도 괜찮다. 하지만 알았으면 좋겠다. 그 무너짐 또한 과정일 뿐이라는 걸. 문제를 해결하든 해결하지 못하든, 계단을 오르든 내려가든 그것은 그저 과정일 뿐이다.

글. 오선화(<그저 과정일 뿐이에요> 저자)

지금은 결과가 아니에요
“결과가 나빠요.”
청년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을 때, 취업을 하지 못했을 때, 대학에 가서도 성적이 좋지 않을 때, 취업을 해서도 성과가 좋지 않을 때, 청년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내가 묻는다. 고작 지금이 인생의 결과냐고. 인생의 결과는 아니지만, 인생의 결과가 될까 봐 두렵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자연스레 공감이 된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으니까.
매번 우리는 장애물 달리기를 하듯 장애물을 넘는다. 하나 넘고 나면 또 하나가 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장애물이 있다는 걸 알지만, 하나를 넘기 전에는 넘지 못할까 두렵고, 넘은 후에도 안심할 수 없다. 앞에 또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한 경기가 끝나도 안심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또 얼마 후에 시작될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
결과가 좋다고 안심할 수는 없지만, 결과가 좋기를 바라고, 매번 지금의 결과가 인생을 결정 지을까 두렵다. 그 마음을 충분히 공감한다. 나도 같은 마음일 때가 많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지금이 과정이라는 희망을 안고 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결과가 나쁜 것이 아니라 지금의 과정이 나쁜 것이라면, 결과가 나쁘다는 생각에서는 해방될 수 있으니까. 과정이 힘들다고 결과가 힘든 것은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계속 하고 있으면 되어가기는 하니까.

되지 않은 게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열심히 해도 되지 않아요.”
이 말 또한 청년들의 입에서 많이 나오는 말이다. ‘흙수저’와 ‘금수저’라는 단어가 탄생하면서 우리는 알아버렸다. 흙수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래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으며 열심히 했는데, 결국 ‘되지 않음’을 맞닥뜨리니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절망 앞에서 나는 묻고 싶다. ‘되지 않음’을 어떻게 아느냐고. 지금이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되지 않음’을 아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지금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되어가고 있지 않음’을 말할 수는 있지만 ‘되지 않음’을 속단할 수는 없다. 물론 되어가고 있지 않는 것도 절망일 수 있다. 그러나 더 노력할 의지를 앗아가지는 않는다.
나는 청년들이 ‘된다’는 결과를 정해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서간 사람을 보며 ‘저 정도는 되어야 된 것’이라고 정해둔다면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밥을 할 때 쌀이 씻겨지고 밥이 앉혀지는 게 아니다. 쌀을 씻고 밥을 앉히는 것이다. 능동이지 수동이 아니다. “공부가 잘 안 돼”라는 말은 “공부가 하기 싫어”라는 뜻일 때가 많다.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하면 된다.
하고 있으면 되어가기는 한다. 되어가다 보면 되기도 한다. 된다는 결과를 누군가에게 빗대어 결정해두지 않는다면 결코 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되지 않음’인지 ‘됨’인지는 인생의 끝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이니 지금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청년들이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 게 있죠. 그건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된다’가 어느 정도인지 정해두었기 때문이에요.”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요
“걔가 훨씬 더 잘해요.”
흔히 들을 수 있는 동문서답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요”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답이니까. 나는 대면하고 있는 A에게 부탁했는데, A는 B를 보라고 말하는 꼴이다. 하지만 나무랄 수 없다.
그 동문서답은 한 때 내 것이기도 했으니까.
“걔가 더 잘하는 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데…”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의 눈에도 자꾸 비교대상만 보인다면, 이 주문을 함께 외우자고 주문하고 싶다. 어차피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존재다. 걔와 더불어 살아야 하지만 걔가 잘한다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 ‘잘함’의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모호하다. 그런 기준에 나를 맞추려다가 납작해지느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선택하자. 그 선택 또한 결과가 될 수 없으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또다시 경기가 시작되더라도 지금이란 과정을 잘 지나가고 있는 자신에게 인정과 찬사를 보내자.
지나간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아도 지나갔단 기억은 위로를 주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