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Life · 한적한 그곳

바닷가 마을의 정겨운 담화 위로 태양은 가득히

동해 논골담길

저 멀리 산 위에 하얗게 빛나는 묵호 등대를 중심으로 켜켜이 층을 쌓듯 자그마한 지붕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사이로 통하는 골목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찬란한 햇살을 가득 품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낮엔 알록달록 정겨운 담화가 우리를 반기고, 어슴푸레 저녁노을이 내려앉을 즈음이면 집집마다 켜진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는 이곳은 동해 논골담길이다.

글. 오민영 사진. 안지섭

지게와 고무대야에 생선 싣고 행복 찾아 걷던 길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여정은 묵호항 수변공원에서 시작한다. 완만한 곡선의 해안을 감싸 안은 제방에 올라 짙푸른 바다와 마주하니 맑은 물이 먹색(墨)을 이루고, 잔잔하기가 호수(湖) 같다는 이름의 의미가 과연 깊이 와닿는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지난 2018년 2월,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을 비롯한 북한 예술단 소속 140여 명이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응원 차 만경봉92호를 타고 들어왔다는 항구가 보인다. 지금은 아침 10시에 울릉도로 향하는 여객선이 출항한다. 여기서 5분 거리에 논골담길이 있다. 김미자 해설사는 크게 네 갈래로 뻗어 있는 골목 중 등대오름길에서 논골1길로 내려오는 코스를 추천한다.
“원래 논골이라는 지명은 산 중턱에 밭이 아닌 논이 있는 고을이라고 해서 지어졌어요. 1960년대부터 어업이 성행하면서 갓 잡은 싱싱한 생선을 지고 오르다 보니 자연히 물이 떨어져 길이 논도랑처럼 질퍽인다 해서 그리 불렀죠.”
어렵고 배고팠던 시절, 지게 하나면 먹고산다는 말이 돌 정도로 동해는 풍부한 수산 자원을 아낌없이 내줬다. 여름엔 오징어가 풍년이요, 겨울엔 명태가 지천이니 구슬땀 흘리는 보람이 있었다. 줄줄이 딸린 식구를 건사하기 위해 아버지는 사시사철 바소쿠리를 지게에 얹었으며, 어머니는 빨간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나섰다. 물론 미끄러운 데다 연탄재로 온통 까맣게 물든 길에서 걸음을 옮기려면 ‘마누라나 남편보다 더 중요한’ 장화는 필수였다.
그토록 부지런했던 덕분에 전성기엔 넉넉한 살림살이를 이뤄냈다.
조업 마치고 돌아오는 밤이면 으레 탁주 집에서 잔 부딪히는 소리와 노랫가락이 경쾌하게 울려 퍼지던 시대가 불과 30여 년 전이다.
하다못해 동네 백구까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까. 이제는 과거에 머무른 풍경이지만, 곳곳에 당시 모습을 빼곡히 그려낸 담화가 슬며시 웃음을 자아낸다.

“원래 논골이라는 지명은 산 중턱에
밭이 아닌 논이 있는
고을이라고 해서 지어졌어요.
1960년대부터 어업이 성행하면서
갓 잡은 싱싱한 생선을 지고 오르다 보니
자연히 물이 떨어져 길이
논도랑처럼 질퍽인다 해서 그리 불렀죠.”

시(詩)가 있는 카페 나포리에서 달콤한 대추차 한 잔
굽이굽이 오르는 가운데 웬 재래식 변소인가 했더니 미간에 잔뜩 힘주고 어정쩡한 자세로 쭈그려 앉은 <똥 누는 아이> 동상이 안에 숨어 있다. 마을에 하나 있는 화장실이라 꽤 오래 기다린 모양인지 휴지를 꽉 쥔 주먹이 퍽 재미난다.
이어서 드라마 <상속자들> 여주인공인 차은상의 집으로 나온 촬영지를 지나 꼭대기에 오르면 비로소 당당하게 선 묵호 등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민가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등대로, 사방을 두루 돌아보는 스카이워크를 갖추고 있다.
정점을 등지고, 논골1길로 내려오는 중턱엔 바람의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풍향계를 달아 바람을 가늠하곤 했던 장소인데 광활한 절경과 어우러진 벤치와 패널이 있어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차가운 날씨에 따스한 온기가 간절하다면 보랏빛 라일락을 연상케 하는 카페 나포리에 들러보는 건 어떨까. 묵호가 낳은 시인의 작품 감상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향긋한 대추차를 만나볼 수 있다 .

짭조름한 해풍과 함께 무르익어가는 바다의 꿈
제법 경사진 탓에 종종걸음으로 내려오다 보면 자연스레 주민과 인사를 건넬 기회가 자주 생긴다. 지난 2010년 동해문화원에서 주관한 ‘어르신 생활문화 전승사업’ 진행으로 담화마을을 구축한 이후 누구나 가이드를 자처하니, 궁금한 게 있다면 주민에게서 바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논골담길을 내려왔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겨울에 묵호를 들렀다면 마땅히 먹태를 맛봐야 한다.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명태를 차가운 해풍에 건조해서 만들기에 언바람태라고도 부르는 이 검붉은 생선은 전국에 불티나게 팔려 가는 명물이다. 15~20일간 눈과 비를 피해 말리는 정성에 힘입어 감칠맛과 영양이 온전히 응축해 있으니 황태보다 한 수 위요, 자꾸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서울에선 구워서 고추냉이 넣은 마요네즈 간장에 곁들인다지만, 여기에선 북어처럼 때리고 찢어서 된장에 찍어 먹어요. 꼬들꼬들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가 조화를 이루니 그야말로 일품이죠.”
현재는 여덟 군데 덕장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는 전통 방식에 따라 싸리에 엮은 먹태가 주렁주렁 걸리니 짭조름한 내음이 물씬 풍긴다.
이 계절을 따라 바다의 꿈이 무르익어간다.

동해 논골담길
• 위치 : 강원 동해시 논골1길 2
• 이용 시간 : 상시 이용 가능(휴무 없이 연중 개방)
• 입장료 : 무료
• 연락처 : 033-530-2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