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 생각하기

우리는 왜 웃는가!
힘든 때일수록 웃어야 하는 이유

“언제 울어야 할 팔자가 될지 모르므로 나는 무엇에든 웃는 겁니다” 극작가 피에르 보마르셰가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한 말이다. 웃음은 인간 고유의 행동 양상이지만, 요즘처럼 그 의미가 퇴색한 때도 별로 없다. 지난 1년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참 힘겹다. 시원하게 웃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상점 직원의 ‘자본주의적 미소’도 보기 어렵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 마스크 시대의 현대인은 웃을일이 별로 없다. 마스크 뒤에 숨겨져 있으니 굳이 억지 미소를 지을 이유도 없다. 카카오톡의 웃음(^^) 표시만이 ‘우리가 웃던 때’를 추억할 뿐이다.

글. 박한선(신경인류학자, 정신과 전문의)

긍정적 감정의 표현, 웃음
표정이 없다고 감정도 없는 것은 아니다. 웃음은 여섯 가지 기본적 감정의 하나인 기쁨의 표현이다. 소위 하등 동물도 가지고 있다. 개나 고양이의 얼굴에서 불안이나 분노의 표정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웃는 개, 웃는 고양이를 본 적 있는가?
기쁜 감정은 포유류 전반에서 관찰되는 보편 감정이며, 오랜 진화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웃는 동물은 드물다. 침팬지는 제법 인간과 비슷하게 웃지만, 예외적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잘 웃지 않는다. 웃음을 만드는 얼굴 근육 자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웃음은 내적 감정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호를 전달하는 기능이 있다. 웃음의 절반은 남을 향한 것이다. 코미디 영화를 홀로 즐기는 철수, 그러나 표정은 마치 석고상처럼 무표정하다. 즐겁다는 신호를 보여줄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이 있어야 웃는다. 혼자 있으면 좀처럼 웃지 못한다.

‘유쾌한’ 씨의 웃음, 웃음의 역류
웃음은 양방향성을 가지는 독특한 행동 양상이다. 기쁨은 웃음을 유발하지만, 남과 같이 있을 때 효과가 증폭된다. 주변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는다. 이내 모든 이의 기분이 유쾌해진다. 웃음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훨씬 빨리 전파된다.
부부싸움을 하는 철수와 영희, 끝까지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짐을 싸서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영희, 이를 보며 성질을 내는 철수.
과연 싸움이 끝날 수 있을까? 그때 들리는 ‘뿌우웅’ 소리. 철수가 방귀를 뀐 것이다. 이혼을 하느니 마니 공방을 벌이던 커플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활짝 웃는 영희를 보며, 철수도 곧 따라 웃는다. 오늘의 부부싸움은 그걸로 끝이다.
기분이 좋으면 웃는다. 그러나 반대로 웃을 때도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좋은 기분’이란 참 애매한 상태다. 가을바람에 굴러가는 낙엽에도 기분이 좋아지고,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 향도 기쁨을 줄 수 있다. 작은 미소든, 박장대소든 이러한 감정이 웃음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면, 다시 자기 마음으로, 그리고 주변 사람의 마음으로 긍정적 감정이 전파되는 것이다. ‘유쾌한’ 씨는 늘 유쾌해서 웃는 것이 아니다. 잘 웃기 때문에 늘 유쾌한 것이다.

“인생이 눈물의 골짜기라면
무지개로 다리가 놓일 때까지
힘껏 웃어라!”

– 미국의 시인, 루시 라르콤 <세 개의 오랜 속담> –

코로나 시대의 웃음
자영업자는 막다른 길에서 하루하루를 한숨 속에 보내고 있다. 이미 실직한 사람, 그리고 실직의 위기에 몰린 직장인, 늘어나는 것은 대출뿐이다. 도무지 웃을 일이 없다. 에이, 재미있는 영화라도 볼까? 기분 전환하러 공연장에라도 갈까? 하지만 철문이 굳게 닫힌지 벌써 일 년.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평균 웃음 횟수를 조사하면, 분명 엄청나게 감소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웃기는’ 연구를 하는 연구자는 없겠지만.
하지만 코로나19는 양반이다. 우리 조상은 훨씬 더 어려운 시기를 살았다. 불과 100여년 전, 열 번이 넘게 호열자, 즉 콜레라가 조선을 덮쳤다.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갔다. 지난 역사를 통해 수많은 전염병이 인류를 습격했다. 천연두와 나병, 인플루엔자, 페스트 등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감염병으로 죽던 시대다.
이런 시대라면 도무지 웃음이 진화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 조상은 그래도 웃었다. 전쟁과 전염병, 기아와 압제는 인류 사회에서 한 번도 근절된 적이 없지만, 인류는 그 와중에서도 웃고 또 웃었다.
슬픔을 몰라서 웃은 것이 아니다. 죽은 이를 애도하지 않아서 웃은 것도 아니다. 그래야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초상집에서도 모두 모여 웃던 우리 조상이다. 울며 슬퍼하는 시간만큼이나 웃고 떠드는 시간도 중요한 애도의 과정, 정화의 의례다. 종종 우리는 웃음을 통해 슬픔을 더 잘 다룰 수 있다.
코로나19 시대의 슬픈 현대인,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웃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