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같은 고서들이 숨겨진 책박물관

책에는 특유의 향기가 있다. 이제 막 제본을 마치고 나온 새 책을 집어 들면 아직 가시지 않은 새 종이와 잉크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반면 사람의 손을 거친 나이 든 책에서는 구수하고 친근한 세월의 향기가 풍긴다. 책장을 잘못 넘기면 날카롭게 손을 베어버리는 새 책보다
부드러운 질감으로 손끝에 착 감기는 헌책을 더 좋아하게 되는 수많은 이유들 중 하나일 것이다. 헌책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르는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속으로 들어가 본다.

편집실 사진 이정수

어려웠던 전후 시절에 하나둘 생겨난 책방골목

부산 1호선 자갈치역 3번 출구로 나와 좁은 골목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보수동 책방골목을 만날 수 있다. 걸어가는 길목에 부평시장을 지나쳐야 해 어묵, 비빔당면, 상어고기 등 먹거리 유혹에 빠져버리면 도착하는 시간은 조금 더 늦어질 수도 있겠다. 두꺼운 책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간판이 보이면 보수동 책방골목에 도착이다.
지금은 보수동 책방골목의 상징이 된 책을 든 동상과 보수동 책방골목의 모음과 자음을 분리하여 만든 조형물이 현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책방골목의 역사는 1950년 6·25전쟁 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는 각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와 책, 만화 등을 가져다 중구 보수동사거리에서 판 것이 책방골목의 시작이었다.
전쟁 후의 삶은 모두 빈곤했기에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과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싶은 지성인들은 책에 목말라했다. 그런 수요에 따라 헌책을 찾는 사람들이 증가했고, 보수동에 노점 형식의 책방이 늘어남은 물론 가건물에도 책방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규모가 커지면서 1960~70년대에는 70여개의 점포가 들어서게 되었고, 지금의 책방골목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세월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책방 문화

지금처럼 출판문화가 발달하기 전인 1970~80년대에는 책이 무척 귀했고, 다 읽은 책은 헌책방에 팔곤 했다. 그렇게 책을 판 돈으로 또 다른 책을 사고 다 읽은 책은 다시 파는 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보수동 책방골목이 부산 최고의 명소였다. 35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보수동 책방골목번영회 허양군 회장(대영서점 대표)은 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제가 처음 서점을 열 때만 해도 책방골목을 찾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신학기만 되면 밀려드는 사람들로 골목 전체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어요. 오죽하면 사람들 한테 밀려서 책방으로 저절로 들어가게 되는 진풍경도 펼쳐졌죠. 어린이날이면 서점 밖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책들이 순식간에 팔릴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책방골목은 물론 출판업 역사의 산증인 허양군 회장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출판문화가 바뀌고 있다며 책방골목 역시 그에 따라 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 이곳은 부산 사람들보다 서울에서 관광으로 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고, 특별한 책을 찾는 마니아들의 성지가 되었다. 가족 단위로 와 각각 필요한 책을 고른 후 택배 배송으로 집에서 편리하게 받아보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직접 이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수동 책방골목 쇼핑몰(www.bosubookstreet.com)에서 손쉽게 책을 고르고 받아볼 수 있다.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많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많은 서점들은 인문, 교양, 철학, 만화, 잡지 등 실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갖추고 있다. 초판 책이라든지 절판된 책, 희귀본 등 귀한 책들은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골목 어딘가에서 본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는 글귀처럼 이곳의 책을 통해 다듬어지고 자라난 사람들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동 책방골목이 관광지로 유명해지다 보니 작은 폐해도 생겼다. 책 구매를 위해 찾는 사람만큼이나 인증사진을 남기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책을 소중히 다루지 않아 손상시키는 사람들도 간혹 있어 안타깝다. 허양군 회장이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일반 대형서점에서도 책을 휴대폰이나 카메라로 촬영하는 걸 금지하잖아요.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기념으로 남기는 인물 사진은 괜찮지만 책의 내용을 촬영하거나 책을 함부로 다루는 건 피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평범해 보이는 책이어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물처럼 값진 것이니까요.”
서점을 둘러보고 원하는 책도 구입했다면 잊지 말고 가야 할 곳이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이다. 2010년에 만들어진 이곳은 책방골목 입구, 8층짜리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과거 모습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은 물론 희귀도서를 보관하고 있는 책 박물관, 잠시 책을 보며 쉬어갈 수 있는 북카페 등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포토존에서의 기념촬영과 문학자판기 사용은 꼭 해보자. 문학자판기는 터치 몇 번만으로 감성을 충전해주는 문구가 출력된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휴식’을 터치했을 때 나온 문구는 노천명 시인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의 구절이었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 마당엔 하늘을 마음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라는 구절에 왠지 모를 위안을 받는 것 같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가고 싶은 곳이 어디든 가상의 세계로 데려다 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해답을 찾게 해주는 책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어 더 행복한 곳이다.